백치들 3 0
의심할 여지없이 자격미달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분명 “그래서 어쩔건데” 하면서 쾌재를 불렀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뭉게는 꼴밖에 안된다는 것은 알 턱이 없고 … 결국 자격미달인 자들은 무지하기 이를 데 없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또 다른 백치들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자격미달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분명 “그래서 어쩔건데” 하면서 쾌재를 불렀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발로 뭉게는 꼴밖에 안된다는 것은 알 턱이 없고 … 결국 자격미달인 자들은 무지하기 이를 데 없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또 다른 백치들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North Country”에서 Josey Aimes의 난공불락의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모습이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바로 나 또한 그녀처럼 지극히 주류에서 비껴나가 있는 마이너러티이며, 권력앞에 끝없이 무기력한 억압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에 대한 저항이 불러올 엄청난 파장과 고통이 이미 예견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저항은 더욱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North Country에서)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권력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내가 부여받은 별볼일 없는 특권으로 그 특권마저 박탈당한 자들에게 내가 억압을 가했던 순간들과 일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나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모멸감마저 들었다.
다수가 소수에게, 억압하는 자가 억압받는 자에게 가하는 습관화된 폭력에 대해 저항할 수 없음, 혹은 저항하려 하지 않음을 생각해 보면 (North Country의 광산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일상적인 폭력이나,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위협을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불평등, 불합리, 불공평한 처우는 당연시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권을 위해서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사회의 골칫거리도 위협도 될 수 없다. 오히려, ≪노사과연≫의 이야기처럼, 투쟁의 목적은 “만족해하는 임금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Josey Aimes의 투쟁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노동절 새벽에 …
오랜만에 맘에 드는 Google Doodle이 올라왔다. 1893년 4월 20일. 초현실주의 화가 Joan Miró (1893 - 1983) 의 생일축하 구글로고다.
자꾸 답을 요구한다. 5분만에 정답에 근접한 대안책을 보여줬다. 그건 또 아니란다. 교과서 밖을 내다 볼수가 없기 때문에, 사물을 형식과 틀에만 자꾸 꿰어 맞추려고 한다. 능력이 모자라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더라면 실망이라도 하지 않았을텐데. 백치가 되기 싫다면, 끈질긴 인내심이라도 길러야 한다.